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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새


가부장제를 넘어서는 사유의 씨앗- 이혜경 소설집 『틈새』 이혜경은 소설집 『틈새』에서 가족이라는 제도적 굴레가 어떻게 사회적 문제로 표출되고 있는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녀의 소설에 나타나는 새로운 관계에 대한 열망은 실상 새로운 관계를 부정하는 사회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보다 명료하게 표현된다. 「물 한 모금」에서 이혜경은 한국사회 외국인 노동자의 절망을 세심하게 다루고 있으며, 「문 밖에서」라는 작품에서 그녀는 자신과는 다른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다. 「물 한 모금」에 등장하는 외국인 노동자 샤프는 “손이 잘리고 다리가 잘리고 더러 빈털터리 주검이 되어 돌아온 이들”을 보면서도 복사가게를 운영하고자 하는 꿈으로 한국에 온다. 하지만 그에게 한국사회는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실 수 없는, 비정한 사회로 비쳐진다. 그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인내하며 일을 하지만, 일을 할수록 복사가게에 대한 그의 꿈은 점점 멀어진다. 외국인 노동자는 한국사회가 지탱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한국사회에 뿌리내리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는 한국사회의 현실은 그만큼 한국사회에 차별이 만연해 있음을 입증한다. 타자들의 꿈은 견고하게 구축된 차별구조에 의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으로 남게 되는 셈이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이 내집단을 통한 외집단의 차별로 드러난다면, 「문 밖에서」에 나타나는 차별은 내집단 내부에서 벌어지는 양상으로 묘사되고 있다. 내집단 내부의 차별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분명하게 반영한다. 차이는 일상적인 삶에서도 인정되지 않고 있거니와, 집단 내의 동일성을 강요하는 ‘P’라는 여성 인물의 행태는 일상 속에 침투한 차별의 논리를 예증한다 하겠다. ‘P’는 벤처회사에서 받은 스톡옵션으로 경제적인 성공에 이른 인물이다. 그녀를 중심으로 다양한 유형의 여성들이 모이고, 그녀들은 때때로 모임을 갖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세계를 꾸려간다. 하지만 모임 속의 개인은 자신만의 비밀을 간직할 수 없다. ‘P’가 우연히 영화관에서 사랑에 빠진 ‘H’를 만나면서, H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H의 사랑과 관련된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이 모임에서 오고간다. 이 소설의 중심인물인 ‘L’의 지적처럼, 그녀들은 “H가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으로 H의 사랑을 단정하고, 그에 따라 H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퍼붓는다.’ “짧은 대립과 난처한 웃음”으로 그런 상황에 대응하는 H의 마음 따위는 애초부터 그녀들에게는 관심사항이 아닌 것이다. 언뜻 타자에 대한 관심으로도 비쳐지는 이러한 상황은 실상 모임의 결속력을 강화하려는 ‘P’의 의도로 적절하게 통제되며 진행된다. “엄마가 물려준 십자가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S와 몸에 무언가를 붙이는 게 싫어서 시계도 안 차고 다닌다는 O”에게 별자리목걸이를 선물하고, 그 목걸이를 해야만 보내 준 사람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라고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상황 역시 타자들의 삶에 드리워진 동일자의 논리를 드러내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릴 때 살던 동네에 쌍둥이 형제가 있었어. 내 친구의 바로 위 오빠니까 나보다 세 살쯤 많았을 거야. 학교에서 돌아와 집으로 가려면 꼭 거쳐야 하는 골목이 있었는데, 마을 여자아이들은 골목 어귀에서부터 숨을 죽여야 했어. 그 쌍둥이가 길을 막고 못 가게 했으니까. 지들 마음에 들면 보내고 안 그러면 물을 끼얹기도 하고. 지들이야 장난이겠지만, 혼자 그 길을 지나야 할 때면 어찌나 겁이 났는지, 마음속이 꺼매지는 것 같았는데…… 언제부턴가, 우리가 모였다 헤어질 때면 어릴 적의 골목이, 그 골목을 지키고 있던 쌍둥이 형제가 생각났어. (106쪽) L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 정작 L이 나타나지 않는다. S가 집에 들르자 L은 인용문에 나오는 우화를 S에게 들려주고 있다. 마음에 들면 그냥 보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짓궂게 사람들을 괴롭히는 쌍둥이 형제는 자신의 생각에 따라 타자의 삶에 개입하는 동일자의 논리를 상징할 것이다. L은 “내가 골목을 지키는 쌍둥이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P를 중심으로 한 모임에 참여하는 걸 망설이고 있다. 모임 속에 내재된 동일자의 논리는 그 논리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마저도 동일자의 논리로 포섭하여, 결국 모임 구성원 전체가 자의든, 타의든 동일자의 논리로 통일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동일자의 논리는 그러므로 주체 스스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지 않는 한 누구나가 빠질 수 있는 존재의 수렁이다. 자신이 그토록 부정했던 “쌍둥이들”이 바로 자신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은 이혜경이 이야기하는 ‘바깥’의 사유가 자신(주체)에 대한 철저한 성찰을 통해 펼쳐질 수 있음을 예시한다. 거기에는 어느 누구도 동일자의 논리에 빠질 수 있다는 섬뜩한 자기인식이 있지만, 동시에 그 섬뜩한 자기인식만이 동일자의 논리에 “틈새”를 낼 수 있다는 작가의 소설적 사유가 담겨 있다. 「망태할아버지 저기 오시네」와 「늑대가 나타났다」 두 작품에는 작가의 이러한 사유가 우의적인 수법을 빌어 표현되고 있다. 두 소설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은 설화적인 배경과 어울려 내부세계의 편협한 자기동일성의 논리를 비판하는 매개로 작동하고 있다. 「망태할아버지 저기 오시네」는 어린 시절 무서운 꿈에 곧잘 등장하던 “망태할아버지”를 “안락한 내 집 어딘가에 숨어 있을 바퀴벌레”에 비유하여, 이유도 모른 채 공포에 떠는 사람들의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 자신의 삶을 위협한다고 생각한(각인된) 대상들이 왜 위협의 대상인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망태할아버지나 바퀴벌레는 원래부터 그렇게 인식되어 왔기 때문에 위협적인 대상일 뿐이다. 사람들의 안락한 삶 뒤편에 도사리고 있는 무반성적 삶의 현실은 동일자의 논리가 현실세계를 지배할 수밖에 없는 정황을 설명해준다. 「늑대가 나타났다」에서 이러한 논리는 “어른들이 가지 말라는 곳에 갔다간 단박에 늑대에게 잡혀갈 거다”라는 말을 통해 변주되어 나타난다. 늑대는 경계의 외부에 있는 존재이다. 어른들의 말(관습)을 따르지 않는, 다시 말해 경계의 외부를 넘보는 아이들에게 ‘늑대인간’은 결코 본받아서는 안 될 ‘금기’를 상징한다. 중요한 것은 늑대인간이 왜 금기의 대상이고, 늑대인간이 과연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주체는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모르지만 늑대는 무서운 대상이고, 모르지만 늑대는 함께 존재해서는 안 될 대상이다. 하지만 “저수지 너머에서 사는 아이들”처럼 마을 ‘바깥’에는 분명 사람들이 살고 있다.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상황만큼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 있을까? 경계의 외부를 향한 호기심(욕망)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집을 떠나 경계의 외부로 나아가게 한다. 그녀는 경계의 외부에서 아내가 죽은 다음 ‘처제와 함께 사는’, 그래서 ‘늑대’의 친척이라고 불리는 병태 아저씨를 만난다. 아저씨 못 만났으면 어쩔 뻔했냐. 아이 혼자 돌아다니다간 큰일난다. 그가 고개를 살짝 뒤로 돌리며 말했다. 늑대와 친척인 그가 늑대 이야기를 하는 게 신기했다. 어쩌면, 마을 어른들이 그를 잘못 본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스름녘, 들판을 혼자 걸어가는 아이에게 말을 걸어준 사람은 마을 안에서 늑대 취급을 받던 그뿐이었다. 먹빛으로 더 짙어진 가로수들이 이제 무섭지 않았다. 나는 슬그머니 그의 허리춤을 잡으며 그의 등에 몸을 기댔다. (234쪽) “들판을 혼자 걸어가는 아이에게 말을 걸어준 사람”이 마을 안에서 늑대로 취급받던 병태 아저씨뿐이라는 점에 주목하자. 경계의 외부에 존재하는 인물이 주인공을 경계의 내부로 되불러들이는 존재로 나타난다는 역설 앞에서, 그녀는 비로소 어른들의 말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보게 된다. 경계의 외부에 늑대는 있었지만, 그 늑대는 경계의 내부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무서워했던 ‘늑대’는 아니었다. 스스로 “내가 나 아닌 아기늑대인 것 같”다고 생각하는 그녀는 이제 경계의 내부와 외부를 넘나드는, 말 그대로의 ‘늑대인간’이 되었다. 새롭게 탄생한 이 늑대인간은 어떻게 될까? 마을에서 ‘멋쟁이’로 통하던 영희 언니처럼, “탑에 갇힌 공주처럼 저녁마다 공들여 빗던 머리채를 잡힌 채 질질 끌려서” 집으로 돌아와 어둠이 깔릴 무렵마다 ‘으어헝’ 소리를 외치는 존재로 돌변하게 될까? 작가는 아기늑대의 탄생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 그 아기늑대의 후일담에 대해서는 일체 입을 다물고 있다. 소설 자체가 우의적이므로 그것은 독자의 상상력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것일까?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투영된 ‘늑대인간’의 이야기는 독자들의 끊임없는 상상력을 촉구한다. 마을에 새겨진 금기는 이 상상하는 독자들의 힘이 모여야만 새로운 맥락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화라는 형식에 담긴 이러한 이야기가 우리 사회의 견고한 차별구조를 부수는 틈새로 작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내면의 ‘섬’에 갇힌 인물들이 유독 많이 나타나는 이혜경 소설의 특징과 우화의 형식은 서로 연관되지 않을까. 우화 속에서 경계의 내부와 외부를 넘나드는 인물이 실제의 현실 속에서는 폐쇄된 내면에 갇힌 채 살아간다면, 그것은 그만큼 ‘경계의 외부’를 향한 이혜경의 소설적 상상력이 소설의 담론 내부에 갇혀 있음을 예시한다
1982년 세계의 문학 에 중편소설 「우리들의 떨켜」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혜경은 등단 25년 남짓한 기간 동안 그늘진 삶의 구석구석을 애정어린 시선과 정교한 필치로 형상화해온 대표적인 여성작가로, 더디지만 탄탄하고 뚜렷한 행보를 걸어왔다.

이번 소설집에서는 긴 여운과 잔잔한 문학적 감동을 던지는 이혜경 소설미학이 농익으며 변주되는 장면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오늘을 사는 인간의 더욱 깊어진 아픔을 섬세하게 천착하는 작가의 감성을 확인케 하는 다양한 소재와 등장인물이 눈에 띈다. 이주노동자, 전화선으로만 삶을 사는 네트워커, 소도시 가전제품 기사, 여행가이드, 대형마트의 보안요원 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마다 욕망으로 벌어진 현대인의 삶의 틈새에 밀착해 감싸고 보듬으려는 작가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틈새 에는 2006년 제13회 이수문학상 수상작인 「피아간(彼我間)」을 비롯한 8편의 단편과 미발표 신작 단편 「섬」이 수록되어 있다.


물 한 모금
그림자

문밖에서
틈새
피아간
크레바스
망태할아버지 저기 오시네
늑대가 나타났다

해설 : 황도경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