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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가지를 흔들 듯이

오늘처럼 더운 날이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그저 덥다, 이 생각만 하게 된다. 그것이 비단 여름뿐만이겠는가. 봄에는 황사때문에 코가 간지럽다, 싫다. 가을에는 아 외롭다, 살찐다. 겨울에는 춥다, 아 춥다. 태생이 시인과는 거리가 멀기에 단순하고 일차적인 생각만 한다. 그러다 가끔 시를 읽게 되면, 같은 시간을 살면서도 다르게 표현하는 그들에게, 시에게 감탄한다.정완영 시인의 <꽃가지를 흔들듯이>는 동시조집이다. 그러나 형태를 자유롭게 배치하여 동시조라는 느낌보다는 참한 동시의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낯설다, 라는 느낌보다는 익숙한데, 뭔가 다른 새로움이 느껴진다.까치가 깍 깍 울어야아침 햇살이 몰려들고꽃가지를 흔들어야하늘빛이 살아나듯이엄마가 빨래를 헹궈야개울물이 환히 열린다.동시조에도 행과 연을 도입하여 동시인듯 하면서도 마지막 종장의 첫 구절은 세글자로 시조의 형식을 갖추었다. 어떻게 보면 동시와 동시조의 구별을 짓는 일이 무의미한 듯 한 이 시들은, 그러나 동시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규칙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규칙성이 시를 더욱 안정감있게 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어딘가 차분한 마음이 들게 한다. 시에서도 그러한 차분한 느낌이랄까, 나지막이 일러주는 할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하다. 철저히 구어체의 문장으로 구성된 시조들은 할아버지 무릎에서 듣는 옛이야기들을 닮았다. 따뜻한 옛 정취를 함뿍 담았음에도 오래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건, 시인의 마음 속에 동심이 살아 있기 때문이리라. 읽으면서 가장 좋았던 시도 그런 시조였다. 아이와 할아버지가 묻고 대답하는 듯한 <꽃과 열매>라는 시조는 호기심 많은 아이와 할아버지의 대화를 엿듣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나뭇잎은 새파란데꽃은 어찌 새빨갈까세상에 꽃 빛깔 많아도잎 닮은 빛 엎는 것은벌 나비환하게 불러열매 맺잔 뜻이란다.그러면 이상하다꽃은 붉고 샛노란데어찌해 풋열매는잎을 닮아 새파랄까잎 속에덜 읽은 열매를숨겨 두잔 뜻이란다.용하고 또 용하다높고 깊은 하늘의 뜻열매가 다 익으면고운 빛깔 갈아입혀과일은새에게 주고 씨는 묻잔 뜻이란다.<봄비>로 시작한 동시조는< 설날 아침>으로 이어진다. 사계절을 동시조에 담아내었다. 봄에는 상추씨도 뿌리고 보리밭을 건너기도 한다. 박꽃을 보다가 큰나무 아래서 더위도 피한다. 불러만 보아도 단물 잘잘 흐르는 달이 뜨는 한가위도 보내고 강물 소리 나는 연줄을 팽팽하게 감아 높이 연을 올려 띄운다. 지금은 잊혀진 일들이 많다. 요새 아이들이 상추씨를 알 것이며, 보리밭의 푸른 너울을 본 적이 있을까. 박꽃은 어떤 색인지 알려나. 희뿌연 하늘에도 달은 뜨는지, 연이 하늘로 올라가면 가슴이 벅차서 터질 것 같은 그 마음도. 아마 이 시조들을 읽어본다면, 아이들도 경험하고 싶을 것이다. 연도 상추씨도 박꽃도.읽는 내내 가슴이 저미게 아름다운 추억들을 떠올리게 된다. 내가 기억하는 추억들을 몇 개의 자음과 모음들로 살려낸 시인의 마음에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그림을 그린 김수연 화백에게도 감사한 마음이다. 소설은 영화같고 시는 사진 같다고 했던가. 머리 속에 장면 장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시와 함께 그림으로 표현되어 더욱 좋았다. 시조들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그림들이었다. 하나하나가 작품이고 감탄이었다.나이가 들수록 느려지는 미학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좀 더 어렸을 적에는 빠른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느리게 이해하고 느리게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즐기고 간직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정완영 시인의 동시조도 그렇다. 느릿느릿 나지막이 얼러주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들처럼.

초등학교 국어 3-1 가에 동시조 「봄 오는 소리」 수록!엄마 목소리처럼 환한 시조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아흔여섯 한평생을 시조시인으로 외길을 걸어온 정완영 선생의 고전 동시조를 다시 만날 수 있는 축복과도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정완영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로 동시조집을 펴낼 만큼 우리 고유의 얼이 담긴 시조가 아이들의 마음에 가 닿기를 바란 시조시단의 거목이다. 그래서 이번에 보물창고에서는 1979년에 펴낸 첫째 동시조집 꽃가지를 흔들 듯이 와 1998년에 펴낸 두 번째 동시조집 엄마 목소리 가 절판된 것을 아쉽게 여겨, 요즘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작품들을 골라 다시 펴내게 되었다. 꽃가지를 흔들 듯이 에는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동시조 「봄 오는 소리」를 비롯해 정완영 선생의 깊은 시심을 느낄 수 있는 21편의 동시조가 담겨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동시조로 꼽히는 「분이네 살구나무」, 정완영 선생 시조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엄마 목소리」, 「꽃가지를 흔들 듯이」 등과 같이 두고두고 읽히고 있는 명시조들을 이 한 권의 책에서 만날 수 있다. 우리 고유의 가락과 얼이 담긴 시조를 우리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것은 분명 뜻깊은 일이다. 그것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조시인이 쓴 것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신형건 시인도 추천사에서 이러한 바람을 남겼다.

봄비
봄 오는 소리 1
봄 오는 소리 2
엄마 목소리
꽃가지를 흔들 듯이
분이네 살구나무
동백꽃
바다 앞에서
팔베개
바람은 나무가 집이래
새 자전거
큰 나무 밑에 서면
꽃과 열매


추위도 달아요
보신각 종소리
설날 아침 1
시 쓰는 밤
우리 할아버지는
옛날 옛날 옛적부터